'돌따먹기'에서 '인생'으로: 바둑이 가르쳐 준 성숙함이 만드는 '보는 법'의 차이
안녕하세요! 혹시 같은 사물이라도 시기와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보이는 경험, 해보셨나요?
어린 시절의 저에게 '바둑'은 그랬습니다. 오늘은 저의 바둑 경험을 통해 '보는 법'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그리고 그 변화 속에서 우리가 얻는 삶의 깨달음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발라드를 아무리 들려줘도 뽀로로나 아기상어 노래에만 반응하는 어린아이들처럼, 때로는 같은 것을 보면서도 왜 어른과 아이의 시선은 이토록 다를까요?
1. 아이의 눈으로 본 세상: '나' 중심의 인지와 단순한 감정
제가 '바둑'을 처음 배운 것은 초등학교에 막 들어갔을 때였습니다. 근처 복지회관에 작은 바둑학원이 있었죠. 솔직히 그때는 바둑이 그저 '알까기를 하는 알까기 도장' 인 줄로만 알았어요. 작은 돌들을 튕기는 것이 왜 재미있는지, 그때는 딱지치기나 팽이치기가 더 좋았고, 그냥 친구들과 웃고 떠드는 그 장소, 그곳이 놀이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학원'이라는 고정관념(Fixed Mindset) 때문에 처음엔 거부감이 들었죠.
저는 바둑이라는 게임을 얼마나 몰랐냐면, 당연히 저보다 높으신 최고수이신 당시 원장님(제가 알기로는 아마 5단 정도 되셨을 겁니다)이 12점을 놓아주셔도 지기 일쑤였습니다. 사실 그 당시 저는 바둑이 그저 돌따먹기나 알까기인 줄로만 알았거든요..ㅋㅋ 돌을 놓다 보면 처음에는 제 돌이 많아서 이길 줄 알았죠. 하지만 어느새 바둑판은 '하얀 눈', 즉 흰 돌이 사방팔방에 펼쳐져 있고 제 돌은 전부 죽어 '사석'으로 돌통에 '타라락' 담겼습니다. 저는 그 이유를 도무지 모르니 답답할 노릇이었죠.
학원에서 책을 줘서 사활 문제 등을 풀어오긴 했지만, 머리가 아파서 귀찮기도 했고 '왜 해야 하는지' 이유도 몰라 거의 다 찍기 일쑤였습니다. (사실 전부 찍었다고 보면 됩니다 ㅋㅋㅋ) 원장님은 자꾸 바둑판에 돌을 놓아보라고 꾸중을 하시더군요. (지금 생각해보면, 수순이 머릿속으로 그려지지도 않고 수읽기가 되지 않으니 천천히 수순대로 놓아보라는 말씀이셨던 것 같아요. 아, 물론 제가 바둑 고수는 아니지만요 ^^;; 제 말이 정답이 아니라 그렇다는 거죠 ㅎㅎ;) '정석은 외워 왔냐'느니 하시면서, 머리가 아파 죽겠는데도 안 외워오면 풀거나 맞출 때까지 계속 수순대로 놓게 하셨습니다.
(12점놓고)지고 나서 원장님은 씨익 웃으면서 "와! 그리 억울하나?(부산분이셨어요)" 하며 저를 살살 놀려대셨습니다. 그 순간 저는 참았던 울음을 터트리고 학원을 뛰쳐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 바둑학원에는 다시 발걸음조차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웃픈 이야기죠. ㅋㅋ
어릴 적 저는 바둑처럼 사회화의 잣대가 없는 순수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곤 했습니다. 그 순수함이야말로 '하늘을 나는 자동차'라는, 어른의 눈에는 '완전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현실로 믿고, '슈퍼맨'이 된 양 높은 계단에서 뛰어내리는 무모한 행동을 감행했던 이유이자 '타당성' 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스케치북에 땅에서는 바퀴로 굴러다니다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저만의 상상 속 자동차, 즉 '샹카'(제가 직접 지었던 '하늘을 나는 바퀴'라는 의미)를 수도 없이 그렸죠. 날개를 달고 하늘을 뚫고 날아오르는 샹카를 마치 제가 직접 만든 것인 양 세세한 부분까지 상상하며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처럼 순수한 상상력은 어른들의 '현실' 논리나 물리 법칙(예: 중력)을 이해하지 못하던 시절의 '나'를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어릴 적에도 조훈현, 이창호 9단님 등 당대 명인들의 이름 몇 명 정도는 알았습니다. 바둑학원에서 원장님이 매일 그분들 이름으로 된 책(예를 들면 '조9단의 사활 풀이집, 맥점 풀이집' 같은)이 나왔는데, 그걸 보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고, '월간바둑' 같은 잡지도 학원에 몇 권 있었는데 거기서도 봤던 것 같네요. ㅎ
어른들이 무엇 때문에 이 바둑판을 뚫어져라 보는지, '바둑판은 인생 그 자체다!'라는 말이 대체 무슨 의미인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저 시키니까 하는, 또 하나의 숙제 같은 존재였죠. 이때의 저는 **구체적이고 즉각적인 자극에 반응하고 '나'의 관점에서 세상을 이해하는 아이의 '인지 발달 단계'**에 있었습니다. 바둑의 심오한 전략이나 철학을 이해할 '스키마(Schema)'가 형성되지 않았던 것이죠. 마치 사회화가 덜 된 아이가 아무리 발라드를 들어도 그 깊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뽀로로나 아기상어 노래에만 반응하는 것과 같습니다.
2. 성숙의 눈: '인생'이 된 바둑, 의미의 확장
그렇게 바둑은 어린 시절의 흐릿한 추억 속에 잠들어 있다가, 대학생이 되어서야 비로소 저의 삶에 깊이 들어왔습니다. 바둑이라는 게임을 정확하게 이해하게 된 건 이세돌 9단의 바둑을 보면서였습니다. 그의 날카로운 수읽기, 상대의 의도를 거스르는 통찰력, 그리고 제 기준에서는 100수 앞을 내다보고 한 수 한 수 매서운 눈으로 구리 9단과의 '10번기' 대국을 승리하는 것을 보면서 정말 짜릿한 전율을 느꼈습니다.
그때부터였을 겁니다. 저도 마치 프로 기사처럼 사활이며 맥점이며 필사적으로 공부를 해 보려 했던 것이요. 특히 면도날처럼 날카롭고 한 수로 몇 수 앞을 내다보는 천재적인 수읽기로 유명한 일본의 명인 사카다 9단의 '사카다의 맥'이라는 책을 주로 보곤 했습니다. 물론 쉽지만은 않았죠. 공부를 하며 특히나 사활 문제를 풀 때면 너무 머리가 아팠습니다. 한 수를 놓으면 머릿속에서 돌이 사라지고, 또 다른 한 수를 놓으면 사라지고… 마치 마법이 일어나는지, 놓으면 사라지고 없어지기를 반복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포기하지 않고, 제가 풀 수 있는 선에서는 기력 향상을 위해 최선을 다해 풀었던 것 같습니다. 이처럼 난관에 부딪혔을 때 견뎌내고 다시 도전하는 '좌절 내성(Frustration Tolerance)'은 바둑을 통해 얻은 중요한 배움 중 하나였습니다. 이는 '성장형 사고방식(Growth Mindset)'의 발현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쉬웠다면 저도 저기 바둑TV 스튜디오에서 반상에 돌을 놓고 있었을 테니까요.
다채롭고 다양하고 신기에 가까운, 수많은 유명 바둑 명인들의 기보를 보면서 저는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현재는 '신공지능'이라는 별명을 가진 신진서 기사와 전투적인 기풍인 최정 9단의 바둑 스타일을 가장 좋아합니다. 정말 프로 바둑을 보고 있노라면 재미는 있는데, 해설이 없거나 인공지능이 두는 수는 너무 어렵습니다. 대충의 의미는 알고 있습니다만, 정확한 수는 모르죠.
이처럼 **'경험의 축적'과 '인지 발달'**이 깊어지면서, 저에게 바둑은 더 이상 단순한 '돌따먹기'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행마(돌의 움직임), 정석(스타크래프트로 치면 빌드 오더), 세력 대 실리, 혹은 수읽기(전략적 측면)로 치열하게 반상을 운영하는 것.' 이 모든 요소들이 한 수 한 수 둘 때마다 그 결과가 바뀌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바둑판이라는 우주는 참으로 어렵고도 신비로웠습니다. 비로소 **'마음 이론(Theory of Mind)'**이 발달한 성인의 눈으로, 바둑 속 상대방의 의도와 전략을 읽어내고 진정한 공감(혹은 예측)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3. 같은 사물, 다른 의미: 모든 것의 '성숙도'에 따른 변화
이처럼 같은 '바둑'이라는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린 시절과 성인이 된 후 극명하게 달라진 것처럼, 우리 삶의 모든 것들은 우리의 '성숙도'와 '경험의 축적'에 따라 그 의미가 변화합니다.
- '인지 발달 이론'의 적용: 아이의 눈에는 즉각적인 보상이나 눈에 보이는 현상만이 중요하지만, 어른의 눈에는 그 뒤에 숨겨진 복합적인 의미, 전략, 인간적인 고뇌가 보입니다. 이는 아이가 집에서 어리광을 부리지만 유치원에서는 모범생이 되는 '페르소나'의 변화와도 연결됩니다.
- '의미 구성(Meaning-Making)'의 심화: 우리는 경험을 통해 '스키마'를 끊임없이 재구성하며, 익숙한 것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삶을 풍요롭게 만듭니다.
4. 마치며: '인생 복기'를 통한 성장의 지혜
특히 바둑을 두고 있으면 인생의 전 과정을 미리 시뮬레이션하는 것 같습니다. 한 수 한 수 두어질 때마다 바뀌는 판의 구도는 마치 제가 한 걸음 한 걸음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서 어디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운명이 바뀌듯이 느껴집니다. 아무리 신중하게 한다 한들, 지나간 시작을 돌이킬 수는 없죠.
하지만 바둑은 '복기(復碁)'라는 것이 있습니다. 복기는 바둑이 끝난 후 처음부터 다시 바둑판을 놓아보며, 자신이 두었던 수와 상대가 두었던 수를 되짚어보는 과정입니다. '복기'를 통해 '내가 그때 왜 이 수를 두었을까?', '더 좋은 수는 없었을까?' 하며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다음 수를 대비하죠. 복기를 통해 저의 삶을 돌아보게 되고, 제가 지나온 길을 찬찬히 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처럼, 제가 초등학교 때의 바둑의 의미와 현재 어른이 된 저의 바둑의 의미가 다르고, 또 과거의 기술과 현재 AI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그리고 유행과 같은 모든 것은 시대에 따라 그 의미와 느낌이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아남아 도태되지 않느냐, 아니면 성공하느냐는 바로 이 부분인 것 같습니다. 누가 이런 현 시대, 각 시대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고 무엇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달라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드라마 '미생'의 장그래가 처음 회사를 입사하여 바둑 연구생으로 있다가 본인을 '미생'이라고 표현했던 것처럼, 우리도 완벽하다고는 하지만 사실 그 위치, 그곳이 '완생(完生)'인지 '미생(未生)'인지는 그 시대에 따라, 또 훗날의 평가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살아온 것만으로도, 이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고 노력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완생'에 가까운, 잘 적응하고 있는 삶이 아닌가 싶습니다. 바둑은 저에게 단순한 게임을 넘어, 기술의 혁신까지 알려준 계기가 된 소중하고 영원한 친구 같은 존재가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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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추천곡입니다^^]
이 글은 '성장', '도전', '인내', '고뇌', 그리고 '시간의 흐름'을 통한 '깨달음'을 담고 있습니다.
- 김동률 - '기억의 습작': (시간의 흐름 속에서 과거의 기억과 의미를 되새기는 모습이 글의 성찰적인 분위기와 잘 어울립니다.)
- [MV | 건축학개론] 전람회 - 기억의 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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